창작 단편 · 등장인물과 사건은 허구입니다.
냉장고 문을 열기 전에
수연은 우유가 없다는 것을 냉장고를 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침에 마지막 우유를 컵에 따랐고, 빈 종이팩을 헹구다가 전화가 와서 싱크대 옆에 뒤집어두었다. 저녁에 돌아와 보니 팩은 그대로였다. 물방울만 말라 있었다.
외투를 벗기도 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호였다.
‘마트 들를 건데 뭐 사 갈까?’
수연은 반가웠다. 퇴근길에 마트까지 들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십오 분쯤의 시간을 돌려받는 일이었다. 우유라고 쓰다가 멈췄다. 달걀도 두 개밖에 없었다. 세탁 세제는 펌프를 기울여야 나왔고, 욕실 휴지는 마지막 묶음을 뜯었다. 하지만 휴지를 먼저 사면 민호가 들고 오기 불편할 것 같았다. 오늘은 우유와 달걀만 적었다.
‘늘 사던 거?’
‘응. 우유는 작은 걸로.’
‘달걀은 몇 개짜리?’
수연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다음 주에는 둘 다 저녁을 밖에서 먹는 날이 있었다. 열 개면 되겠다고 답했다. 냉장고 안쪽에 밀어놓은 반찬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만든 것인지 생각하다가, 내일 점심에 먹으려던 것을 어제도 잊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뚜껑을 열었다 닫고 맨 앞쪽으로 옮겼다.
휴대전화에는 민호가 보낸 진열대 사진이 떠 있었다. 작은 우유가 두 종류였다. 수연은 익숙한 포장 쪽을 표시했다. 어느 쪽이어도 괜찮았을 텐데, 표시를 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관 앞에서 외투를 벗었다. 가방은 아직 어깨에 걸려 있었다. 집에 돌아온 지 십 분이 지나 있었다.
민호가 장을 보는 동안 수연은 밥을 안쳤다. 밥솥에 쌀이 충분한지, 내일 아침에 먹을 것이 있는지, 빨래를 돌리면 자기 전까지 널 수 있는지 생각이 이어졌다. 각각은 작은 일이었다. 그래서 피곤하다고 말하려면 작은 것들을 오래 늘어놓아야 했다. 설명을 시작하기도 전에 별일 아닌 것을 크게 말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날 낮에는 관리사무소에서 문자가 왔다. 금요일 오전에 수도를 잠깐 잠근다는 안내였다. 수연은 회사 회의 중이라 알림만 읽고 넘어갔다가 퇴근하는 버스에서 다시 찾아봤다. 민호에게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우유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또 잊었다. 기억해두어야 한다는 생각만 남아서 다른 생각들의 가장자리에 걸렸다.
무엇을 도와주면 돼
민호가 도착했을 때 밥솥에서는 김이 나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장바구니, 다른 손에는 회사에서 가져온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신발을 벗으며 오늘 지하철이 오래 멈췄다고 했다. 수연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장바구니 안에는 우유와 달걀, 수연이 좋아하는 빵이 들어 있었다. 빵 봉지는 아직 미지근했다. 마트 옆 가게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샀다고 했다.
“이거 아직 팔더라.”
“고마워.”
수연은 빵을 접시에 옮겼다. 고마운 것은 사실이었다. 민호가 퇴근길에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묻고, 빵까지 골라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질문에 답하던 동안 자신도 계속 장을 보고 있었다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 다음에 그 이야기를 꺼내면 앞의 말이 취소되는 것처럼 들릴까 봐 망설였다.
민호는 손을 씻고 와서 물었다.
“뭐 도와주면 돼?”
수연은 볶던 채소를 뒤집었다. 식탁을 닦아달라고 하면 됐다. 물컵을 놓아달라고 해도 됐다. 평소에는 그렇게 말했다. 부탁하면 민호는 대개 바로 했다. 느리거나 마지못해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설명하기가 더 어려웠다.
“오늘은 그걸 정하는 것도 좀 힘들어.”
민호가 서 있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수연은 불을 줄였다. 말끝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갔다. 민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게 덧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먼저 한 말을 무르느라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 날이 많았다.
“물어보지 말라는 거야?”
“그건 아닌데.”
기름이 팬 한쪽에서 작게 튀었다. 수연은 손목을 뒤로 빼고 불을 껐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문장을 골랐다. 냉장고 안의 우유, 욕실의 휴지, 수도가 끊기는 금요일. 지금 이야기하면 민호는 당장 휴지를 주문하고 물을 받아둘지도 몰랐다. 그러면 몇 가지는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다음에 무엇이 떨어지는지 먼저 알아차리는 일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것 같았다.
“뭐가 필요한지 아는 사람이 늘 나인 게 힘든 것 같아.”
민호는 식탁의 서류 봉투를 들어 의자 위에 놓았다. 봉투가 닿은 자리에 가느다란 물자국이 남았다. 컵 밑에서 묻은 물이었다. 민호는 행주를 가져와 닦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우선 밥을 먹자고 했다.
둘은 평소보다 조용히 먹었다. 수연은 대화를 잘 시작했다는 생각도, 망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채소가 조금 짰다. 민호는 물을 한 컵 더 마셨다. 빵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접시 위에 있었다.
목록을 쓰는 사람
설거지는 민호가 했다. 수연은 식탁에 앉아 우유팩을 바라봤다. 냉장고에 넣기 전에 민호가 내려놓은 것이었다. 일어나서 넣으면 끝나는 일인데, 잠깐 그대로 두었다.
“나도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물이 멈추자 민호가 말했다. 수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하는 일들도 있었다. 분리수거를 내놓고 자동차 점검 날짜를 챙겼다. 지난달에는 수연의 노트북이 켜지지 않아 늦게까지 함께 고쳤다. 그 일들을 하나씩 세기 시작하면 대화가 어느 쪽이 더 많이 했는지 계산하는 쪽으로 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없던 일처럼 넘기고 싶지도 않았다.
“알아.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오늘 산 물건의 개수는 아니야.”
민호는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수연은 휴대전화 메모를 열었다. 장보기, 세탁소, 관리비, 반납할 책. 서로 다른 때 적어둔 내용이 순서 없이 붙어 있었다. 지난주에 끝난 일도 지우지 않아 남아 있었다. 목록을 보여주려다가 자신도 알아보기 어렵다는 생각에 화면을 내렸다.
“이걸 정리해서 보내주면 되겠네.”
민호가 말했다. 나쁜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수연은 메모의 첫 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커서가 깜박였다.
“정리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하잖아.”
이번에는 말을 하고 나서 서둘러 웃지 않았다. 식탁 위가 잠깐 조용해졌다. 민호는 자기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럼 내가 뭘 맡으면 좋겠어?”
수연은 그 질문에도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둘이 시작하려면 어떤 이야기는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민호가 지금 당장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알 수는 없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과, 설명을 더 할 힘이 없는 마음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선 아침에 먹을 것. 뭐가 남았는지 보고 사 오는 것까지.”
“우유하고 달걀?”
“그 두 개만 말고. 우리 내일 아침에 뭘 먹을지 생각하는 것까지.”
민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고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문 안쪽에 잼이 두 병 있었다. 하나는 거의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뚜껑이 열리지 않아 오래 둔 것이었다. 민호가 어느 것을 먹느냐고 물으려다 병을 꺼내 유통기한을 읽었다. 수연은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새 규칙이 생겼다고 집안일이 곧바로 반으로 나뉜 것은 아니었다. 욕실 휴지와 세탁 세제는 여전히 수연의 머릿속에 있었다. 금요일 단수 안내도 전해야 했다. 수연은 그 이야기를 했다. 민호가 관리사무소 문자 수신자를 자신도 추가할 수 있는지 내일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수연은 ‘잊지 말고’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잊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작은 팩 두 개
다음 날 아침에는 빵을 먹었다. 민호가 냉동실에 있던 식빵을 너무 오래 구워 가장자리가 딱딱했다. 수연은 탄 부분을 조금 떼어냈다. 민호는 다음에는 시간을 줄이겠다고 했다. 수연은 평소 몇 분을 돌리는지 알려주려다가 그가 타이머를 확인하는 것을 보고 커피를 마셨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민호는 저녁에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수연은 자신도 일이 남을 것 같다고 했다. 둘은 저녁을 각자 먹기로 했다. 어제 대화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갑자기 출근길에 다정한 말을 길게 하지는 않았다. 층수 표시가 하나씩 줄어드는 동안 민호는 셔츠 소매를 접었고, 수연은 가방 안에서 교통카드를 찾았다.
점심 무렵 민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관리사무소 문자 추가했어. 금요일 아침엔 물 미리 받아둘게.’
수연은 알겠다고 답했다. 메모에 적어두었던 ‘단수 말하기’를 지웠다. 한 줄이 없어졌을 뿐인데, 화면을 닫은 뒤에도 그 빈자리가 잠깐 생각났다.
이틀 뒤에는 달걀이 떨어졌다. 민호는 퇴근길에 사 오려다가 잊었다. 다음 날 아침 냉장고를 열고서야 생각났는지 한동안 문을 잡고 있었다. 수연은 안쪽에 달걀이 없다는 것을 전날부터 알고 있었다. 사 오라고 말할까 하다가 말하지 않았다. 이제 일부러 모른 척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아래에서 김밥 사 올게.”
민호가 말했다. 수연은 지갑을 찾으러 가는 그의 등을 보았다. 자신이 우유나 달걀을 사 오지 못했을 때도 다른 것을 먹으면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은 하나가 빠지면 자기 하루 전체가 허술해진 것처럼 느꼈다. 그 마음이 어디서 생겼는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수연은 식탁 위에 물컵 두 개를 놓았다.
주말에는 둘이 마트에 갔다. 민호는 우유를 작은 팩 두 개로 골랐다. 큰 팩 하나가 더 싸다고 수연이 말했다. 민호는 이번 주에는 집에서 아침을 먹는 날이 적으니 하나씩 뜯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수연은 계산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인지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장바구니 안에 두 팩이 나란히 놓였다.
휴지는 여전히 수연이 골랐다. 세제도 마찬가지였다. 계산대 앞에서 다음에는 이것들도 나누어보자고 말하려다, 집에 돌아가 앉아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을 보면서 급하게 덧붙일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민호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반대 손으로 옮겼다. 수연은 가벼운 빵 봉지를 들었다. 두 사람의 손에 든 무게는 달랐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일의 무게도 아직 달랐다. 어제보다 공평해졌다고 이름 붙이기에는 이른 주말이었다.
냉장고에 우유를 넣다가 수연은 아침에 마실 것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그 생각이 다음에 사야 할 것을 세는 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민호가 날짜를 확인하고 두 팩을 차례로 세워놓고 있었다.
수연은 냉장고 문에서 손을 떼었다. 식탁 의자를 당겨 앉으니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무릎까지 닿았다. 아직 치우지 않은 장바구니가 발 옆에 있었다. 조금 뒤에 접어두면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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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작은 변화로 이어지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