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일을 위한 이야기

쉬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날

[창작 단편]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고 집에 돌아온 지현은 답장을 몇 번이고 확인한다. 비어 있는 달력 한 칸과 짝이 맞지 않는 양말 사이에서, 아무 약속도 더하지 않는 저녁을 보내본다.

이 글의 목차 4개의 이야기

창작 단편 · 등장인물과 사건은 허구입니다.

보내고 나서

지현은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아. 미안해.’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차가 크게 흔들렸다. 손잡이를 잡느라 휴대전화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가, 정류장에 발을 디디자마자 다시 꺼냈다. 문장 옆에는 아직 숫자 하나가 붙어 있었다. 조금 전에는 너무 많은 이유를 적었다. 이번 주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말, 어제도 늦게 끝났다는 말,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 마지막 것은 쓰고 나서 지웠다. 오늘 집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친구 혜원은 주말 장터에 가져갈 물건의 가격표를 붙이고 있었다. 작은 천 가방과 주머니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 뒤 처음 나가는 장터였다. 가위질만 조금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혜원의 작업실은 지현의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쯤이었다. 버스에서 한 정거장 먼저 내리면 더 가까웠다.

지난달 지현이 이사할 때 혜원은 저녁을 사 들고 왔다. 상자를 풀다 말고 둘이 바닥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냉장고 뒤에서 먼지 덮인 동전이 나왔고, 혜원이 그것을 새집의 첫 수입이라고 해서 웃었다. 그날 받은 도움을 떠올리자 지현은 방금 보낸 답장이 다시 고쳐 보내야 할 말처럼 느껴졌다.

‘정 급하면 한 시간 정도는 갈 수 있어.’

다시 입력한 문장을 한동안 보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건너지 않자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먼저 지나갔다. 지현은 문장을 지우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휴대전화는 손에 쥔 채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침에 벗어놓은 잠옷이 소파 팔걸이에 걸려 있었다. 집을 나설 때 창문을 닫았는지 기억나지 않아 종일 한 번씩 신경이 쓰였는데, 창문은 닫혀 있었다. 지현은 가방을 내려놓고 잠금장치를 손끝으로 한 번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방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났다.

저녁 여섯 시 사십 분. 혜원의 작업실에 가더라도 아홉 시 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반찬통 두 개와 반쯤 남은 두부가 있었다. 문 안쪽에서 소스 병끼리 부딪혔다.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다가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숫자는 사라졌고 답장은 아직 없었다.

비어 있는 저녁

밥을 데우는 동안 지현은 세탁 건조대에서 양말을 걷었다. 빨래는 어제 마른 것이었다. 짝이 맞지 않는 검은 양말이 세 개 나왔다. 두 개를 포개면 길이가 조금 달랐고, 다른 것을 대면 발목의 무늬가 달랐다. 평소라면 아무렇게나 말아 서랍에 넣었을 텐데 그날은 세 개를 바닥에 나란히 놓았다.

전자레인지가 울렸다. 그 소리와 거의 동시에 메시지가 왔다.

‘알았어. 밥 잘 챙겨 먹고 쉬어.’

마침표가 없었다. 혜원은 원래 마침표를 잘 찍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현은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원래는 ‘응응’이라고 먼저 쓰지 않았나. 손을 흔드는 그림을 하나쯤 보내지 않았나. 대화창을 조금 올렸다가, 지난 대화까지 확인하는 자기 모습이 민망해 다시 내렸다.

고맙다고 쓰고 웃는 얼굴을 붙였다. 그러고는 두부를 꺼내다 말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많이 남았어?’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지현은 두부를 네모로 썰어 작은 냄비에 넣었다. 국물을 낼 재료가 마땅치 않아 간장과 물을 조금 부었다. 끓기 시작하자 모서리 하나가 부서졌다. 집에 돌아오면 제대로 된 저녁을 해 먹을 생각이었는데, 냄비 안의 것은 국도 찌개도 아니었다. 지현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맛보고 소금을 더 넣지 않았다.

집중해서 먹으면 십 분이면 끝날 밥이었다. 휴대전화를 식탁 건너편에 두고 먹다가 두 번이나 일어나 화면을 확인했다. 답장이 없는 동안에는 친구가 삐쳤을까 봐 걱정했고, 알림이 울리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걱정이 따라왔다. 정말 손이 모자라 답도 못 하는 것은 아닐까.

혜원이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먼저 거절해도 된다고 덧붙여야 할 의무도 없었다. 지현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어렵다고 한 뒤에는 친구가 괜찮다는 말을 조금 더 해주었으면 했다. 답장을 받아놓고도 무엇을 더 받아야 안심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식탁 끝에 놓인 작은 달력에는 오늘 날짜 아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내일은 병원 예약이 있었고, 모레는 회사에서 자료를 마감해야 했다. 오늘만 비어 있었다. 지현은 그 칸에 집이라고 써볼까 생각했다. 누가 보여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설명할 수 있는 일정 하나가 필요했다.

펜을 찾으러 갔다가 서랍 위에 굴러다니는 건전지를 집었다. 다 쓴 것인지 새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달력에도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손

일곱 시 반쯤 혜원에게 사진이 왔다. 작업대 위에 베이지색 주머니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격표가 붙은 것도 있었고, 아직 실밥이 삐죽 나온 것도 있었다. 사진 한쪽에 낯선 손이 찍혀 있었다.

‘언니가 퇴근하고 들렀어. 둘이 하면 금방 끝나겠지 뭐.’

지현은 우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뒤에는 조금 서운한 것 같은 감정이 붙었다. 자기가 없어도 괜찮아서 서운한 건지, 괜찮아진 줄도 모르고 혼자 오래 걱정해서 허탈한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친구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다행이다. 주머니 색 예쁘네.’

혜원은 염색된 천이라 사진보다 조금 어둡다고 했다. 내일 밝을 때 다시 찍어 보내겠다고 덧붙였다. 지현은 그제야 사진을 확대했다. 어제 보내준 것과 끈의 색이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은 남은 일이 얼마나 되는지, 자신이 가야 하는지에만 마음이 가 있어서 물건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끈 바꿨구나.’

‘응. 네가 회색도 대보라고 했잖아.’

그 말에 지현은 지난주 둘이 문구점 앞에서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혜원이 휴대전화에 저장한 천 사진을 보여줬고, 지현은 옆 가게의 차양 색을 가리키며 저런 회색은 어떠냐고 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한 말이었다. 특별히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지현은 사진을 원래 크기로 줄였다. 가격표의 숫자는 작아서 읽히지 않았다. 언니의 손 옆에는 귤껍질이 놓여 있었다. 친구는 일을 하고 있었고, 귤도 먹고 있었고, 다른 사람과 말도 하고 있을 것이다. 지현이 만들어놓은 장면 속에서는 혜원이 혼자 고개를 숙이고 가위질만 하고 있었다.

‘나는 두부 먹었어.’

왜 그런 말을 썼는지 자신도 몰랐다. 혜원은 두부만 먹었느냐고 물었다. 밥도 먹었다고 하자 엄지를 올린 그림이 왔다. 그제야 대화창이 평소와 비슷해 보였다. 지현은 안심이 되면서도, 그림 하나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사실이 조금 쓸쓸했다.

가방 안에서 책을 꺼냈다. 주말부터 가지고 다녔지만 펼치지는 못한 책이었다. 첫 장을 열자 도서관 대출 영수증이 떨어졌다. 반납일까지는 아직 며칠이 남아 있었다. 지현은 영수증을 다시 끼우고 책을 식탁 한쪽에 두었다. 오늘은 읽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답장을 더하지 않는 밤

설거지를 하다가 손등에 묻은 거품을 내려다보았다. 혜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 더 할까 생각했다. 이사할 때 와준 것도 고마웠다고, 다음에는 꼭 돕겠다고, 장터에는 일찍 가겠다고 이어서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쓰면 잠깐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장터가 열리는 토요일 오전에는 병원에서 추가 검사를 받을 수도 있었다. 내일 진료를 받아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다음에는 꼭이라는 말도 무엇을 약속하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지현은 물을 잠그고 젖은 손을 수건에 닦았다. 대화창을 열지는 않았다.

고마운 일은 여전히 고마웠다. 오늘 돕지 못한 일도 없어지지 않았다. 두 가지를 바로 맞바꾸지 않고 두면 관계가 잘못되는 것인지, 지현은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지금 할 수 없는 다음 약속까지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소파에서 잠옷을 집어 들고 옷을 갈아입었다. 코트 주머니에는 정류장에서 받은 광고 전단이 접혀 있었다. 피아노 학원 전단이었다. 성인 반도 있다는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지현은 버리려다 식탁 위에 놓았다. 어릴 때 배운 곡을 아직 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학원 번호를 저장하지는 않았다.

아홉 시가 되자 방이 너무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의 등을 끄고 소파 옆 작은 전등을 켰다. 전등 아래에서는 바닥에 늘어놓은 양말 세 개의 검은색이 조금씩 달라 보였다. 하나는 남색이었다. 지현은 피식 웃으며 남색 양말을 먼저 집었다.

짝은 건조대 뒤에 떨어져 있었다. 몸을 숙여 꺼내자 등에 붙어 있던 옷이 당겼다. 그날 처음으로 길게 기지개를 켰다. 허리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양말을 접어 무릎 위에 놓은 채 한참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을 켤까 하다가 리모컨을 찾는 대신 등을 소파에 기댔다.

휴대전화가 한 번 울렸다. 혜원의 작업이 끝났다는 메시지일 수도 있었다. 지현은 화면을 켰다. 택배가 내일 도착한다는 안내였다.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서 조금 김이 샜다. 여전히 친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한 번을 집에서 보냈다고 오래된 습관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혜원의 대화창에는 낮에 쓰다 지운 문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현은 마지막으로 받은 엄지 그림 아래에 ‘고생했어’를 썼다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멈췄다. 그 말은 나중에 보내도 됐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양말을 서랍에 넣었다. 접힌 부분이 두툼해서 서랍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열어 방향을 바꾸니 조용히 닫혔다.

소파로 돌아왔을 때 무릎 위에 있던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 지현은 그 자리에 앉았다. 식탁의 달력에는 여전히 오늘 한 칸이 비어 있었고, 전등의 빛은 식탁 위 책까지 닿지 않았다.

A NOTE FOR TOMORROW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작은 변화로 이어지기를.

내일의 문장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
모든 이야기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