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단편 — 등장인물과 사건은 허구입니다.
내릴 곳을 지나서
버스가 다리를 건널 때 지훈은 휴대전화 화면을 아래로 밀었다. 같은 대화를 세 번째 읽고 있었다. 내일 오전에 이야기하자는 말로 끝난 대화였다. 지금 답할 질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화면을 닫으면 자신이 무엇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창밖에서는 상가 간판이 하나씩 불을 켰다. 낮에는 비슷한 회색이던 건물들이 저녁에는 각자의 색을 가졌다. 지훈은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 때문에 바깥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휴대전화를 조금 기울이자 얼굴 대신 형광등이 길게 들어왔다.
집에서 메시지가 왔다. 냉동실에 있는 만두를 저녁에 먹어도 괜찮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지훈은 좋다고 썼다. 보내기 전에 ‘아무거나’라는 말을 지웠다. 무엇을 먹을지 생각한 사람에게 아무거나라는 대답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사이 정류장 이름이 지나갔다.
익숙한 이름이었는데 몸은 일어나지 않았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고 나서야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늘 내리는 약국 간판이 창 뒤로 밀려났다.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려다가, 이미 지나친 문을 보았다. 운전석까지 가서 사정을 말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는 다음 정류장 버튼을 눌렀다. 빨간 불이 들어왔다.
별일은 아니었다. 한 정거장쯤 걸어 돌아가면 됐다. 그 길은 낮에 몇 번 걸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훈은 가방끈을 당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 작은 실수까지 오늘의 목록 끝에 적히는 기분이었다.
오전에 잘못 보낸 파일, 점심을 먹으며 잊어버린 전화, 오후에 두 번 수정한 표. 누가 모아서 보여준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서는 순서가 정확했다. 제대로 보낸 파일이나 마친 일은 그 목록에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버스 문이 열렸다. 지훈은 바닥과 인도 사이의 틈을 내려다보고 발을 옮겼다. 뒤에서 문이 닫히자 엔진 소리가 잠깐 커졌다가 멀어졌다.
돌아가는 쪽
정류장 옆에는 작은 편의점이 있었다. 출입문에 붙은 종이에는 새로 들어온 빵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 테이프를 네 귀퉁이가 아니라 위쪽 두 군데에만 붙여놓아 종이 아래가 바람에 들렸다.
지훈은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운동화 안에서 양말이 접혀 있었다. 아침부터 그랬는지 방금 생긴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벽 쪽에 서서 발뒤꿈치를 들어 양말을 조금 당겼지만, 접힌 부분은 발가락 근처에 있었다.
그는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았다. 빈 의자는 세 개였고, 탁자에는 누군가 두고 간 영수증 한 장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영수증 끝이 움직였다. 날아가지는 않았다. 물이 조금 묻은 모서리가 탁자에 붙어 있었다.
신발을 벗어 양말을 펴고 다시 신었다. 그것뿐인데 발이 한결 편해졌다. 지훈은 곧 일어나려다 가방을 무릎에서 옆 의자로 옮겼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이번에는 업무 단체방이었다. 화면 위로 파일 이름이 나타났다. 지훈은 알림을 펼쳤다. 자신에게 확인을 부탁하는 말은 없었다. 내일 회의에 쓸 자료가 올라온 것이었다.
읽어두면 아침이 편할 것 같았다. 지금 확인해놓으면 집에서는 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파일 이름을 눌렀다가 로딩 화면에서 손을 멈췄다. 오늘도 점심에 같은 생각을 했었다. 밥을 먹으며 미리 확인하면 오후가 덜 바쁠 거라고. 오후에는 또 다른 일이 생겼다.
파일을 닫았다. 그렇다고 내일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에 읽을 일이 그대로 남았다. 지훈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화면을 다시 열지는 않았다.
맞은편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장바구니를 든 사람이 천천히 건넜다. 지훈은 그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끝까지 보지 않았다. 자기 신발 끈의 한쪽이 유난히 길다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십 분이라는 말
집에서는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
‘정류장을 지나쳤어. 조금 걸어가야 해서 십오 분쯤 늦을 것 같아. 만두는 먼저 먹어.’
보내고 나서 시간을 확인했다. 걸어가는 데만 십 분 정도 걸릴 거리였다. 의자에 앉아 있을 시간을 슬쩍 포함시킨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핑계를 만든 것 같았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 한 줄을 더 보냈다.
‘지금 편의점 앞에서 잠깐 앉아 있어. 오늘 좀 지치네.’
문장을 읽어보니 생각보다 큰 고백처럼 보였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이 오면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 특별히 설명할 사건은 없었다. 누구와 크게 다툰 것도 아니었고,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일이 몇 번 틀어졌고, 몇 번 고쳤고, 집에 오는 버스에서 내릴 곳을 놓쳤다.
설명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별일 아니라고 말할 것 같았다. 먼저 꺼낸 말을 스스로 작게 접어 상대가 다루기 쉬운 크기로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답은 조금 뒤에 왔다.
‘알았어. 먼저 먹을게. 들어오면 냉동실에 남은 거 있어.’
곧이어 하나가 더 왔다.
‘내일 분리수거인 건 잊지 마.’
지훈은 짧게 웃었다. 위로받았다고 하기에는 평범한 대화였다. 집의 저녁도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만두를 굽고, 쓰레기봉투가 찼는지 보고, 내일 내놓을 상자를 생각했다. 자신의 피곤함이 그 일을 모두 없애주는 것은 아니었다.
‘응. 상자는 내가 묶어놓을게.’
쓰다가 지웠다가 하는 일 없이 보냈다. 상자를 묶는 것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냉동실 문을 열고 늦은 저녁을 챙겨 먹는 것도. 내일 발표할 자료에 대한 의견을 지금 정리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 셋이 서로 다른 일이라는 생각을 지훈은 의자에 앉아 한참 뒤에야 했다.
모든 것을 하기 싫다고 뭉뚱그려 말하면 자신도 자기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일마다 이유를 붙여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구분한 것으로 됐다고, 누가 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은 편의점 앞에 없었다.
남은 물
지훈은 일어나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쓴 김에 무엇이라도 사야 할 것 같아서였다. 문 위의 작은 종이 울렸고, 계산대에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는 음료 냉장고 앞에 섰다. 달고 차가운 것을 마시고 싶었지만 무엇을 고를 힘은 없었다. 생수 한 병을 꺼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앉았던 의자에는 아직 가방 자국처럼 눌린 먼지가 남아 있었다. 가방은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는 잠깐 자신이 무엇을 두고 나왔는지 생각했다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뚜껑을 열어 두 모금을 마셨다. 물이 너무 차가워 목 안쪽이 아팠다. 병을 탁자에 놓자 바닥에 작은 물자국이 생겼다. 그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옆에 내려놓았다.
맞은편 세탁소에서 사람이 옷을 찾아 나왔다. 비닐에 싸인 소매가 걷는 속도에 맞춰 흔들렸다. 신호가 바뀌기 전에 건너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도 있었다. 큰길을 지나는 버스는 아까 자신이 타고 왔던 것과 같은 번호였다.
이번에는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밖에서 보았다. 한 사람이 내리고 두 사람이 탔다. 빈 의자가 있을지, 어디까지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훈은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려다가 그만두었다. 귀에 무엇인가를 더 넣고 싶지 않았다.
쉬는 동안 읽으려고 저장해둔 글도 있었다. 듣다 만 방송도 있었다. 그것들은 대개 도움이 될 만한 것이었다. 도움이 되는 것을 고르는 일이 하루에서 꽤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훈은 잠깐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등을 펴도 어깨는 무거웠고, 내일 회의 생각은 여전히 돌아왔다. 조금 전에는 다르게 말했어야 했다는 생각도 한 번 더 지나갔다. 다만 생각이 올 때마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지는 않았다. 물병의 뚜껑을 돌려 닫고, 제대로 닫혔는지 다시 확인했다.
앉아 있던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보았다. 집에 보낸 십오 분에서 이미 칠 분이 지나 있었다. 이제 걸어가야 했다.
가방을 놓는 자리
돌아가는 길에는 작은 오르막이 있었다. 버스로는 경사라고 느껴본 적 없는 길이었다. 걷자 숨이 조금 가빠졌다. 지훈은 가방끈을 반대쪽 어깨로 옮겼다. 물병이 들어간 만큼 가방이 무거워져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을 때 집에서 다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익숙한 순서로 움직였다. 문을 열자 구운 만두 냄새가 났다.
“많이 걸었어?”
“한 정거장. 별로 멀진 않더라.”
그는 신발을 벗고 발끝으로 가지런히 놓았다. 안쪽에서 접히던 양말은 이제 괜찮았다. 식탁에는 접시 하나가 엎어져 있었고, 싱크대 옆에는 씻어놓은 프라이팬이 기울어 있었다.
“두 개 남겨놨어. 식었을 거야.”
지훈은 고맙다고 말했다. 냉동실에서 더 꺼내 굽지는 않았다. 남은 만두 두 개를 접시에 놓고 물을 한 잔 따랐다. 편의점에서 산 병은 가방 안에 그대로 있었다.
먹는 동안 오늘 있었던 일을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상대도 다른 일을 하느라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는 않았다. 늦게 온 이유를 설명한 다음에는 조용히 먹을 수 있었다. 그게 그날 저녁에 가능한 대화의 길이였다.
식사를 마친 뒤 지훈은 현관 옆에 쌓인 상자를 폈다. 포장 테이프가 한 번에 뜯어지지 않아 손톱으로 끝을 찾았다. 작은 상자 안에서 더 작은 상자가 나왔다. 그는 빈 상자들을 큰 것 위에 차례로 눕혔다. 내일 아침 들고 나갈 수 있도록 문 옆에 세워두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다 의자 등받이에 걸린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안에는 노트북이 있었다. 꺼내면 파일 하나 정도는 볼 수 있었다. 물병을 꺼내는 동안 노트북 모서리에 손등이 닿았다.
지훈은 물병만 꺼냈다.
책상 대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반쯤 남은 물을 안쪽에 세워놓고 문을 닫았다. 가방은 의자에서 내려 평소 두던 벽 옆에 놓았다. 바닥에 닿으며 지퍼 손잡이가 작게 부딪혔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들어야 할 가방이었다. 오늘 밤에는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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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작은 변화로 이어지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