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일을 위한 이야기

쉬는 날의 빈칸

[창작 단편] 쉬는 날의 목록에는 강의 두 편과 책 삼십 쪽이 적혀 있었다.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 수연은 볕이 드는 벤치에 잠깐 앉는다.

창작 단편 · 등장인물과 사건은 허구입니다.

토요일 아침, 수연은 식탁에 노트를 펴놓았다. 세탁기 청소, 겨울옷 정리, 온라인 강의 두 편. 어제 퇴근길에 적은 목록이었다. 맨 아래에는 책 읽기라고 쓰고 괄호 안에 삼십 쪽을 덧붙였다.

아홉 시가 조금 넘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커피를 내렸다. 일요일 밤에는 주말을 제대로 보냈다는 기분이 들었으면 했다. 월요일 회의에서 누가 주말에 뭘 했느냐고 물으면, 집에 있었다는 말 뒤에 붙일 것도 하나쯤 필요했다.

세탁기에 수건을 넣고 나니 싱크대의 물때가 보였다. 물때를 닦다가 행주 냄새가 신경 쓰여 삶을 냄비를 꺼냈다. 냄비를 올려놓고 온라인 강의를 틀었다. 강사는 시작하자마자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을 복습했다. 지난 시간을 듣지 않은 수연은 영상을 멈추고 강의 목록을 올려다보았다. 완료 표시가 붙은 것은 첫 번째뿐이었다.

결제한 지 두 달이 지났다는 문자가 떠 있었다. 수연은 문자를 지우지 않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회사에서는 작은 생활용품들의 상세 페이지를 만들었다. 컵의 손잡이가 얼마나 편한지, 수납함이 어느 선반에 맞는지 설명하는 일이었다. 같은 흰색도 화면마다 달라 보여서 하루 종일 이미지를 확대했다 줄였다 했다. 금요일에는 수납함 뚜껑 색깔 때문에 퇴근이 늦었다. 결국 월요일에 다시 보기로 했는데, 토요일 아침에도 그 뚜껑이 생각났다.

행주 삶는 물이 끓었다. 불을 줄이고 돌아왔을 때 화면은 어두워져 있었다. 수연은 마우스를 움직이는 대신 책을 폈다. 책갈피는 십칠 쪽에 있었다. 누가 이름을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첫 문장을 읽고 고개를 들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끝났다는 소리가 났다.

수건을 널면서 보니 창틀에 작은 날벌레가 죽어 있었다. 휴지로 집어 버리고 창틀을 한 번 닦았다. 맞은편 건물 창문에 이불이 걸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불의 아래쪽이 들렸고, 안쪽의 분홍색 꽃무늬가 잠깐씩 보였다.

수연은 한 손에 빈 빨래 바구니를 든 채 그것을 보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리지 않았는데도 주머니를 만졌다. 무엇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냉장고에 밥이 없었다. 배달 앱을 열었다가 최소 주문 금액을 보고 닫았다. 편의점에 다녀오기로 했다. 현관 거울 속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눌려 있었다. 모자를 쓰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모자를 찾는 일마저 번거로워 손에 물을 묻혀 눌렀다.

엘리베이터에는 자전거를 세워놓은 아이가 타고 있었다. 아이는 수연을 보자 핸들을 조금 당겼다. 바퀴가 수연의 운동화 앞코에 닿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아이는 일 층에서 먼저 내린 뒤 자전거에 타지 않고 끌고 갔다. 앞바퀴에서 딱,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수연은 아이가 현관을 빠져나갈 때까지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편의점에서는 삼각김밥 두 개와 작은 우유를 샀다. 계산대 옆에는 밤 모양 과자가 있었다. 어릴 때는 가운데 팥만 먼저 먹었던 과자였다. 하나를 더 집었다. 봉투가 필요하냐는 말에 괜찮다고 했지만, 밖에 나오자 우유가 손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건물 옆 벤치에 물건을 내려놓았다. 비닐 포장을 조금 뜯어야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삼각김밥의 첫 번째 비닐을 당기다가 김이 찢어졌다. 수연은 바닥에 떨어질 뻔한 조각을 손바닥으로 받았다. 그냥 여기서 먹고 가기로 했다.

벤치는 볕이 드는 쪽만 따뜻했다. 수연은 놓아둔 우유를 조금 옮기고 엉덩이를 그쪽으로 붙였다. 주차장에서는 아까 그 아이가 자전거를 뒤집어 놓고 페달을 돌리고 있었다. 바퀴의 어느 부분이 지날 때마다 같은 소리가 났다. 아이는 바퀴를 멈췄다가 다시 돌렸다.

첫 번째 삼각김밥을 먹는 동안 수연은 휴대전화로 강의 앱을 열었다. 남은 강의를 여기서 들으면 이동 시간이 낭비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어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를 낮췄지만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강사의 목소리가 묻혔다. 자막은 너무 빨리 바뀌었다.

옆으로 밀어 영상을 닫았다. 엄지손가락에 밥풀이 하나 붙어 있었다.

화면이 꺼지자 유리에 자기 얼굴과 뒤쪽 나뭇가지가 함께 비쳤다. 이대로 앉아 있으면 얼마나 있어도 되는 걸까. 수연은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열두 시 사십 분이었다. 오후에 만나기로 한 사람도, 예약해놓은 일도 없었다.

우유를 마시고 과자를 반으로 나눴다. 팥은 기억보다 적었다. 그래도 나머지 반쪽까지 먹었다. 벤치 아래에 떨어진 부스러기 한 점을 작은 개미가 찾아왔다. 입안이 달아서 물을 사 올까 생각하다가 그대로 있었다.

아이의 바퀴 소리가 멈췄다. 고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자전거를 바로 세우고 다시 끌고 갔다. 수연은 자신도 그랬던 적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 잘 안되면 뒤집어보고 돌려보고, 그러다 일단 들고 집으로 돌아왔던 때.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친구에게 온 메시지였다.

‘뭐 해?’

수연은 ‘밀린 일 하는 중’이라고 썼다. 노트에 적은 목록이 떠올랐다. 오전 내내 움직였는데 줄을 그을 수 있는 항목이 없었다. 세탁기를 돌렸지만 세탁기 청소는 하지 않았다. 책을 폈지만 삼십 쪽을 읽지 않았다.

쓰던 말을 지웠다.

‘집 앞에서 밥 먹었어. 아직 앉아 있어.’

친구는 한참 뒤에 답했다.

‘나도 방금 일어남. 배고프다.’

수연은 웃었다. 웃고 나니 입술 한쪽에 붙은 김이 당겼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확인하고 손끝으로 떼었다. 친구에게 편의점에 밤 모양 과자가 다시 나왔다고 보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유 팩을 버렸다. 손에 남은 것이 없어서 팔을 그냥 흔들며 걸었다. 현관 앞에 도착해서야 열쇠를 챙기지 않았다는 생각에 놀랐다가, 이 집 문은 번호를 누르면 열린다는 걸 떠올렸다. 이사한 지 일 년이 넘었는데 가끔 예전 집의 습관이 튀어나왔다.

집 안에는 삶은 행주 냄새가 조금 남아 있었다. 노트북을 열자 아침에 멈춘 강사가 같은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은 이번 주에 강의를 얼마나 들었는지 확인하려다 덮었다. 식탁 위에 책과 노트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겨울옷 정리 옆에 ‘내일’이라고 쓰려다가 손을 멈췄다. 내일의 칸에도 이미 할 일이 있었다. 수연은 펜을 노트 가운데 끼웠다. 목록을 지우지도, 오늘 다 하지 못한 이유를 적지도 않았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맞은편 이불은 걷혀 있었다. 수건 한 귀퉁이를 만져보니 아직 축축했다.

소파에 누운 뒤에도 두 번쯤 몸을 일으킬 뻔했다. 지금이라도 강의 하나는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친구에게 새 답장이 없는 것을 보고 내려놓았다. 발끝에 접어놓은 담요를 당기자 한쪽 발이 밖으로 나왔다. 수연은 몸을 조금 웅크려 그 발까지 덮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에는 꺼졌다. 바깥에서 누군가 차 문을 닫았다.

식탁에 펼쳐둔 책은 여전히 십칠 쪽이었다.

A NOTE FOR TOMORROW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작은 변화로 이어지기를.

내일의 문장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
모든 이야기로 돌아가기